본문 바로가기

소곤소곤 캘리그라피

세월아 네월아 님의 얼굴은 언제쯤



  남편이 일 마치고 퇴근을 하게 되면, 우리집에서는 하루에 두 번 이상 들리는 소리에요. 무슨 말이냐고요?! 사실 저의 짝지는 왕깔끔쟁이랍니다. 연애할 적에는 참 향기로운 냄새도 나고 얼굴도 항상 말갛고 옷에 머리카락이나 먼지 같은 건, 일년에 두어번 볼까말까했었더랬죠. 제가 알던 남자사람친구부터 선배, 동기, 동생들 중에서 단연! 제일! 깨끗하고 사람같은(?) 남자였습니다. 네, 그래요 그때는 좋았어요. 갑자기 왜 과거형이냐고요? 결혼 1일째 되던 날, 화장실에 들어갔던 울 남편, 정확히 한 시간 20분 뒤에 만날 수 있었어요. 

 '세월아 네월아 목빠지겠네. 아, 뭐 오늘만 그렇겠지.' 저는 속으로 합리화를 시켰으나 그것은 곧 착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도 줄곧 한시간 안에 나온 적이 없었으니까요.


   혹시 변비야?

   아니. 내 원래 좀 오래 있는다아니가. 몰랐나?

   내가 알리가 있겠소?! (ㅡ.ㅡ;)


언제였을까요. 명절에 시어머님과 전을 부치면서 넌지시 여쭤봤어요. 


"어머님, J씨 원래부터 화장실에서 오래 있었나요?" 

"아이고오~~ 지금도 그러나?! 가가 왜 그카는지 진짜 나는 모르겠다. 세월아 네월아 속 터진다 아니가. 내는 포기한지 오래다! 군대 갔다오더니만 더 심해지뿌따 아니가. 몬산다(못살겠다)~"


네. 어머님도 포기한 지 오래라고 하셨어요. 그렇지만 저는 어떻게든 초장에 고쳐놔야겠다는 결심이 서더라고요. 그래서 한날은 가족회의를 했어요. 고작 2명뿐이지만, 저희는 회의라는 명목아래 술한잔 들이키며 취중논의를 한답니다. "앞으로는 씻는 시간을 30분 안에 끝낼 것. 못지킨다 하지말고 지키려고 서서히 노력해봐. 밥 준비하는 사람도 생각해야지. 결혼 전과 똑같이 생활하려 하지마. 우리 함께 노력하는거야. 그러니 욕실에 들어가기 전에 마음을 먹고 들어가." 글로 써놓으니 명령조 같은데요, 실제로는 최대한 부드럽게, 타이르듯이 했답니다. (에휴, 벌써부터 아들한명 키우는 것 같습니다 ㅜ) 그래서 요즘은 욕실 들어가기 전에 타이머로 맞춰두고 시간이 되면 알람이 되도록 해놓았어요. 처음에는 적응하느라 힘든 기색이 보이더니, 한달 두달 지나면서 얼추 지켜지는 것 같더라고요.


 어느날에는 제가 한번 물었어요. 왜 그렇게 오래 있었던 건지. 정말로 한시간 동안 씻기만 하는건지.. 이유가 궁금했어요. 남편이 어릴적에 굉장히 좁은 집에서 살다가 처음으로 아파트로 이사를 갔대요. 자기 방도 생기고 깨끗한 화장실도 생겨서 큰 거울이 있는 공간에서 면도하고 팩도 하고, 욕조에 물받아서 뜨끈하게 몸도 지지고 그런 생활이 너무나도 좋았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진 거라네요. 더 놀라운 사실은 거울에 비친 바디라인을 바라보며 근력운동을 하는 시간이 행복하다는거에요. 

 아니, 무슨 누가 들으면 몸짱인줄 알겠어요. 전혀 아닌데 말이죠~. 어쨌든 그 이유를 알고나니 처음에 화만 냈던 제가 괜시리 미안해지고 또 마음이 짠해지고 감정이 복잡미묘해졌네요. 그래도 고칠 건 고쳐야겠으니, 언젠가는 커다란 전신거울을 사노라 결말을 맺고는 약속은 약속이니 지켜야한다고 말해뒀답니다.


'소곤소곤 캘리그라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치찬란했던 하루  (0) 2018.02.27